도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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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산75-1
- 대표전화
상세설명
- 관리부서 : 산청군 문화관광과/남평문씨문중
- 대표전화/팩스 : TEL 055-970-6441~3 / FAX 055-970-6409
요약정보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충정공 문숙선의 아들인 삼우당(三憂堂) 문익점(1329∼1398) 선생의 묘소이다
개요
산청 문익점 묘 (山淸 文益漸 墓)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충정공 문숙선의 아들인 삼우당(三憂堂) 문익점(1329∼1398)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90)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고 1363년 좌정언에 있을 때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이곳에 있던 최유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삼아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였다. 원의 지원까지 받은 이 계획은 공민왕 13년(1364) 최영에게 패하면서 실패하였다.
문익점은 이 계획에 동참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중국 운남성으로 귀양을 갔다. 귀국할 때 목화씨를 숨겨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하여 의류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우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전위주부에 올랐는데 이성계 일파의 개혁을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죽은 후에는 조선 세종 22년(1440)에 영의정의 관직이 내려졌고, 세조 때에는 사당이 세워졌다.
묘소는 사각형의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앞에는 상석과 비석이,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 석등이 세워져 보존되고 있다.
[전문설명]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1329∼1398) 선생은 남평(南平) 문씨(文氏)로서 충정공(忠貞公) 문숙선(文淑宣)의 아들이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9년(136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공민왕 12년(1363)에는 좌정언(左正言)으로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 이때 충선왕(忠宣王)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 왕시(王)가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최유(崔濡)와 본국(本國)의 김용(金鏞) 등과 비밀히 음모를 꾸며 왕위(王位)에 오를 것을 원나라 순제(順帝)로부터 승낙을 얻은 후, 명망이 높은 문익점 선생에게 동조할 것을 강요했으나 선생은 이를 끝내 거절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다. 이에 운남성(雲南省)으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 목화씨를 숨겨 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재배하여 후세(後世)에 의류면(衣類面)에 큰 혁신(革新)을 가져오는 공을 세웠다. 전의주부(典儀主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사당(祠堂)이 세워졌다. 시호(諡號)는 충선(忠宣)이다. 묘소는 방형분(方形墳)으로 상석(床石)과 비(碑),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석등(石燈)이 갖추어져 보존(保存)되고 있다
문화재지정 현황
문화재구분 | 지정번호 | 지정일 | 제작연대 |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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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기념물 | 66호 | 1983.8.24 | 고려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