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양예수(楊禮壽) | 본관 하음(河陰), 의술에 능하고, 박학하여 1563년(명종 18) 내의(內醫)로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병을 치료했으나 세자가 죽어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어 이듬해 예빈시판관(禮賓侍判官)이 되었다. 1565년 어의로서 명조의 신임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명종을 임종까지 간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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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태(劉以泰) | 본관 거창(居昌), 자 백원(伯源), 호 신연당(新淵堂)·원학산인(猿鶴山人)·인서(麟西). 산청 생초에서 태어났다. 의술이 박학하고, 고명하여 1713년(숙종39년) 어의(御醫)가 되어 임금의 환후(患候)를 고쳤고, 그 공로(功勞)로 숭록대부 안산군수로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향리 산청으로 돌아왔다. 1706년에 홍역전문치료서인 『마진편(痲疹篇)』을 저술하였다. |
유효통(兪孝通) | 본 관 기계(杞溪), 자 행원(行源). 생원 을 거쳐 1408년( 태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성(大 司成)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1431년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와 함께 약용식물을 정리한 『향약채취월령』과 한약방문으로 된 의서『향약집성방』을 편찬했다." |
이경화(李景華) | 본관 진위(振威). 자 여하(汝夏). 호 풍 계(楓溪). 평남 성천(成川) 출생. 1660년(현종 1) 생원 이 되고, 1682년( 숙종 8) 공홍도(公洪道)의 유생들과 함께 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의 문묘종사(文廟從 祀)를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침구(鍼灸)에 능하였고, 경사 백가(經史百家)에도 조예가 깊었다. |
이제마(李濟馬) | 본관 전주(全州), 호 동무(東武), 자 무 평(務平), 함남 함흥 출생. 1888년(고종 25) 군관직에 등용되었으나 이듬해 사퇴하고 1892년 진해현감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사직하고, 1896년 최문환의 반란을 평정하여 고원군수로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주역』의 태극설인 태양ㆍ태음ㆍ소양ㆍ소음이 사상(四像)을 인체에 기질과 성격에 따라 인간을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에 적합한 치료방법을 제시한 사상의학(四像醫學)을 창안하였다. 저서로는『동의수세보원』,『격치고』등이 있다. |
임언국(任彦國) | 한 노파로부터 침술을 배워 어머니의 지병인 종창을 고쳤다. 이 침술로 많은 성과를 거두어 예빈시주부에 기용되었다. 저서에『치종비방』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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